스파이크를 벗어 가방에 던져 넣던 날이 기억난다. 손목 인대가 잡아당기는 느낌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고, 탈의실 냄새가 그날따라 유독 무거웠다. '이제 그만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럭비를 그만두려 했던 순간이 정확히 그때였다. 근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건, 결국 다시 돌아갔다는 뜻이다.
떠난 다음에야 보이는 것들 — 두 달의 공백
그만두고 나서 한동안, 주말 아침마다 이상하게 허전했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더했다.
럭비를 완전히 접고 나서 약 두 달이 지났을 때였다. 아는 사람이 "요즘도 럭비 하냐"고 물어보길래 "아, 그거 그만뒀어"라고 말했는데, 입 안에서 뭔가 쓴맛이 남는 것 같았다. 딱히 설명하기가 어려운 감각이었다. 그냥 아깝다, 그런 느낌. 공허함이라고 해야 할지.
그제야 럭비가 나한테 단순히 운동이 아니었다는 게 보였다. 매주 연습이 있는 날이면 출발 한 시간 전부터 은근히 긴장되는 그 느낌, 경기 직전 스크럼 맞추면서 팀원들이랑 눈빛 한 번 주고받는 것. 그게 다 사라지고 나서야 얼마나 일상의 리듬을 잡아주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있을 때는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럭비를 체격 좋은 사람들만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필드에서 오래 버티는 사람들은 대개 체격보다 포기를 참는 임계치가 높은 편이었다. 몸이 먼저 무너지는 게 아니라 머리가 먼저 '됐다'를 선택하는 것. 그걸 필드 안에서 수없이 목격했고, 나 자신에게서도 확인했다. 그만두기로 했을 때도, 결국 먼저 포기한 건 몸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강한 사람은 없었다 — 스크럼에서 밀리던 날
처음 스크럼을 서던 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선명할수록 좀 민망하긴 하지만.
럭비를 시작한 건 스물두 살이었다. 첫 실전 연습 경기에서 상대 팀 프롭이 밀어붙이는 힘에 그냥 뒤로 밀렸다. 한 번이 아니라 경기 내내. 자세가 무너지고 팀 전체 스크럼이 흔들렸다. 팀원 중 하나가 나를 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리던 것이 기억난다. 창피하다기보다 묘하게 허탈했다. '이게 내 한계인가'라는 생각이 처음 든 건 그날이었다.
그 뒤로 약 3개월을 스크럼 하나만 팠다. 웨이트 트레이닝 무게를 40kg대에서 70kg 가까이 올렸고, 버티는 시간도 처음의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수치로는 그렇다. 근데 사실 더 중요한 변화는 수치가 아니었다. "버티는 게 이 포지션의 본질이다"는 걸 머리가 아니라 몸이 납득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 전까지는 버티는 걸 참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버티는 것 자체가 경기였다.
럭비에서 쓰러지는 건 실패가 아니다. 쓰러지고 나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실패다. 이게 필드 안에서만 통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필드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제대로 이해했다.
그 3개월의 결과를 확인한 건 다음 시즌 첫 경기였다. 스크럼에서 밀리지 않았다. 상대가 밀어붙여도 발이 버텼고, 팀 전체 밸런스가 달라졌다. 팀원이 경기 끝나고 "형 저번이랑 다른 것 같던데?"라고 했다. 그 한마디가 3개월짜리 무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다시 돌아간 이유, 사실 별 거 없었다
두 달쯤 지났을 때, 같은 팀 후배한테서 연락이 왔다. "형, 다음 주 스크럼 연습 인원이 모자란데 와줄 수 있어요?" 거창한 설득도 없었고 감동적인 한마디도 아니었다. 그냥 인원이 필요했던 것. 근데 그날 장갑 끼고 필드에 발을 디딘 순간, 2개월의 공백이 거짓말처럼 지워졌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돌아보니 '그만두고 싶다'는 감정이 사실은 '지쳐있다'는 신호였을 가능성이 크다. 럭비처럼 접촉 강도가 높은 운동일수록 번아웃의 경계가 빠르게 온다. 몸의 피로가 쌓이면 그게 '나는 이 운동에 안 맞는다'는 판단으로 쉽게 치환된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꽤 많은 사람들이 중도에 그만두는 구조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판단 자체가 틀린 게 아니라, 판단의 타이밍이 최악인 거다. 가장 지쳐있을 때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고 있으니까.
혹시 지금 무언가를 그만둘까 고민 중이라면, 딱 한 가지만 생각해봐도 좋다. 지금 이 감정이 '이게 싫다'인지, '지금 너무 지쳐있다'인지. 그 두 가지는 느낌이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럭비 그라운드 밖에서 작동하는 것들
복귀 후 첫 경기에서 또 무너졌다. 두 달 만에 돌아온 몸이 경기 페이스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 예상된 일이었다.
예전이었으면 거기서 또 접었을 것 같다. 근데 이번엔 달랐다. 또 무너져도 '한 번 더 버텨보자'는 생각이 전보다 훨씬 빠르게 들었다. 이 변화가 훈련량이나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 그만뒀다가 돌아온 경험이 있으면, 다음에 그만두고 싶을 때 그게 꼭 끝이 아니라는 걸 몸이 먼저 안다.
럭비를 통해 얻은 가장 실질적인 것을 하나만 고르라면, '한계라고 느낀 순간이 실제 한계가 아닌 경우가 훨씬 많다'는 체감이다. 인생도 비슷하게 돌아간다. 아 근데 이건 좀 다른 얘긴데 — 요리할 때도 비슷한 게 있다. 재료가 솥에 눌어붙는 순간, 불을 끄는 게 맞는 타이밍이 아니라 온도를 올리거나 물을 넣어야 하는 순간인 경우가 많다. 그 타이밍을 잘못 읽으면 요리가 망가진다. 번아웃도 꼭 그렇다. 손을 떼야 하는 순간인지, 방식을 바꿔야 하는 순간인지. 그 구분이 어렵다.
럭비에서 배운 교훈이 '절대 포기하지 마라'는 식의 교훈이라면 솔직히 쓰지 않았을 것 같다. 그 말은 너무 포장되어 있다. 실제로 배운 건 훨씬 소박하다. 포기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타이밍만큼은 가장 지쳐있을 때 하지 마라는 것. 그리고 쓰러지는 것보다 일어나는 게 조금이라도 더 빠른 사람이 결국 오래 한다는 것.
럭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가끔 주변에 럭비를 권하면 "나는 체격이 안 된다", "나이가 많다", "다칠 것 같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 전에 '해봤냐'는 질문을 먼저 해볼 필요가 있다. 럭비의 진입장벽을 높게 느끼게 만드는 건 대부분 실제 경험이 아니라 이미지다.
한계에 도전하는 삶이 거창한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미세한 단위로 이루어진다. 스크럼에서 1초를 더 버티는 것, 그만두려다 한 주만 더 나와보는 것, 무너진 경기 뒤 다음 연습엔 나가는 것. 럭비는 그 미세한 결정들을 매주 반복하게 만드는 운동이다. 그리고 그 습관이 필드 밖에서도 생각보다 오래, 넓게 작동한다는 걸 직접 느꼈다. 그게 이 운동을 다시 시작한 가장 솔직한 이유다.
자주 묻는 질문
Q. 럭비는 체격이 좋아야만 할 수 있는 운동인가요?꼭 그렇지는 않다. 럭비는 포지션마다 요구되는 역할이 다르고, 체격보다 판단력과 지구력이 더 중요한 포지션도 있다. 실제로 백 라인 계열 포지션은 민첩성과 스피드가 체중보다 유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엔 체격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만, 기술이 붙기 시작하면 그 차이가 생각보다 많이 좁혀진다. |
Q. 성인이 되어 럭비를 처음 시작해도 늦지 않을까요?스물다섯 이후에 시작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사회인 럭비 클럽은 대부분 연령대가 넓고, 완전 초보를 위한 기초 연습 프로그램을 별도로 운영하는 팀이 많다. 다만 부상 리스크가 있는 운동이라 처음 진입할 때 기본 기술(태클, 낙법)을 충분히 익히고 들어가는 게 좋다. 이 부분은 제대로 된 클럽을 고르는 게 절반 이상이다. |
Q. 럭비가 정신적으로 강해지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되나요?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그렇다고 본다. 다만 '정신력'이라는 단어가 포장된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서 조심스럽다. 럭비가 주는 건 막연한 강인함이 아니라, 몸이 한계에 가까운 상태에서 판단하고 버티는 경험의 반복이다. 그게 쌓이면 일상에서 '아직 버틸 수 있다'는 기준점이 조금씩 올라가는 것 같다. 그게 정신적 강함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
Q. 한 번 그만뒀다가 다시 시작할 때 어떤 점이 가장 어렵나요?체력보다 마음이 먼저다. 공백 기간 동안 몸이 많이 떨어졌다는 걸 알면서 돌아가는 게 생각보다 부담스럽다. 그만뒀을 당시의 자신과 비교하게 되는데, 그 비교가 복귀 초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성과보다 '다시 나왔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게 도움이 됐다. |
결국 다시 손에 쥔 것
럭비를 통해 한계에 도전하는 삶을 배웠다고 하면, 좀 과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맞다. 그냥 공 들고 뛰다 쓰러지는 운동이다. 근데 그 단순한 구조 안에, 그만두고 싶을 때 한 번 더 버티는 경험이 켜켜이 쌓인다. 그 경험이 필드 밖에서도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
당신이 지금 어떤 것을 그만두려는 순간에 있다면 — 운동이든, 일이든, 뭔가를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든 — 딱 한 가지만 물어보길 권한다. 지금 이 감정이 이게 싫다는 건지, 그냥 지금 너무 지쳐있다는 건지. 그 차이가 꽤 크다. 럭비 필드에서 배운 것들 중 이게 가장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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